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우가멜라 전투 (문단 편집) === 양군의 전력 === || [[파일:external/60bd51e88df898d1583d8d31ae0f99a1af8b23829ec70019b957554fdc3f78b8.jpg|width=370]] ||<^|1>[[파일:external/pds20.egloos.com/e0097032_4c09eaf892c6f.jpg|width=470]] || ||<-2> 페르시아군의 병종(左)과 [[사리사]]를 쓰는 마케도니아의 [[팔랑크스]](右) || 마케도니아의 경우 중장보병은 31,000명으로 세부적으로는 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 12,000명, 히파스피스타이 3,000명, [[그리스]] 동맹군 7,000명, 그리스 [[용병]] 9,000명이었다. 경무장병은 총 9,000명으로써 트라키아 6,000명에 일리리아, 아그리아니아, 크레타가 각각 1,000명이었다. 기병은 대략 7,000명으로, 중기병은 헤타이로이(Companion Cavalry) 2,100명을 포함해 5,000명, 경기병은 2,000명 정도였다. 따라서 총 인원은 4만 7천 명 정도가 된다. 페르시아의 경우 고대 역사가들은 10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했지만, 현대에 이런 수치를 믿을 학자들은 극히 드물다. 영문 [[위키피디아]]에 기재된 현대 학자들의 추산을 보면 한스 델브뤽은 5만 2천 명, 존 워리는 9만 명, 토마스 하버틀은 12만 명이라 추산했으며 엥겔스와 그린은 10만 명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. 보병 중 갑옷과 무기를 제대로 갖춘 이들은 그리스 용병들과 근위대인 [[아타나토이|이모탈]]이 전부였다. 원래 그리스 용병은 대략 6~8,000명, 이모탈은 10,000명이지만 그들 모두 이수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훨씬 적은 숫자가 나왔을 것이다. 궁병들도 있었는데, 페르시아 하면 궁병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2~3,000 명 정도로 비교적 소수였다. 여기에 대량의 징집병들이 있었는데 말이 병(兵)이지 그냥 농민들 마구잡이로 긁어모아서 [[창(무기)|창]]이랑 [[방패]] 쥐어준 수준이었다. 이들이 바로 페르시아 백만대군 신화의 주범인데, 현대 학자들도 대략 수만에서 많게는 10만 이상으로 추정한다. 보병라인은 이처럼 부실했지만 페르시아의 주요 전력은 기병이었다. 다만 [[중세]] [[기사]]처럼 강력한 돌격기병이 아니라, 대부분 투창이나 활 같은 원거리 무기를 활용했다. 심지어 돌격전이 가능한 페르시아 중기병들조차 주 무기는 투창이었다. 다리우스 3세는 대규모 기병전을 위해 [[아르메니아]]에서 [[박트리아]]까지 제국의 동방 영토 전역에서 기병을 끌어모았는데, 적게는 12,000명 선에서 많게는 4만 명까지 추정한다. [[사카족]]의 [[카타프락토이]]도 처음 동원되었는데, 이들은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의 중장기병들보다도 중무장했다고 한다. 위 그림의 중앙에 있는 [[낫전차]] 200대와 전투 코끼리 15마리도 있었다.[* 다만 코끼리들은 페르시아군도 처음 동원해 보는 것인지라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가 모두 생포되었다.] 다리우스 3세는 전차가 상당히 활약할 것으로 기대했는지 가우가멜라 평원의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다져서 전차를 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. [[파일:Scythed Chariot.png]][br]▲페르시아의 기병과 [[낫전차]] 요약하면 마케도니아: 4만 7천 vs 페르시아: 최대 12만 이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